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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송석아카데미 혜화동 저녁모임

 

일시: 10월 13일(월), 20일(월) 저녁 7시 – 9시
주제: 이반 일리치와 그의 친구들
강연: 박경미 | 이화여대 교수 

 

 

 

 

 

"사랑에는 끝이 없다는 걸 나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이제는 정말 잘 알게 되었다네. 나는 이방인이었고, 나는 그대를 낯선 땅에서 만났었지. 그러나 내가 거기서 친구들을 발견한 이상 그 땅은 정말 낯선 곳이라고는 할 수 없었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 소중한 선물의 무게를 짓눌릴 정도가 되었지만, 그러나 결코 짐스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네. 왜냐하면 내 온 가슴이 나를 지탱해준 까닭에... 사랑에는 끝이 없는 탓이라네."

 

12세기 수도사였던 성 빅토르의 휴는 그의 친구 로놀프에게 위와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로놀프에게, 죄인 휴로부터'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낯선 땅에서의 '우연적인 만남'과 그 우연성에 개방되어 있을 때 우연이 필연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여줍니다.

 

상처받은 한 유대인을 돕는 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의 이야기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대상이 누군지와 관계없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후대의 주도적 해석과는 달리 낯선, 적대적이기까지 한 두 사람 사이에 상호적인 관계가 가능했던 '우연'에 주목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12세기에 살았던 성 빅토르의 휴와 시대를 뛰어넘어 친구가 된 20세기의 사상가 이반 일리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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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지막 혜화동 저녁모임에서는 박경미(이화여대 교수) 선생님을 통해 이반 일리치와 그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을까?' '언제쯤 희망찬 미래가 도래할 수 있을까?'라며 미래에 대한 기대(expactation)가 수많은 변형된 말로 뱉어질 때 이반 일리치는 '나는 미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희망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리치가 말하는 희망은 기대섞인 장미빛 미래가 아닙니다. 그에게 희망은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 죽음과 병, 질투와 증오 같은 인간에게 재앙이라고 여겨졌던 모든 것이 다 튀어나온 뒤에 마지막에 남은 '그것'입니다. 희망은 재앙일 수 있는 것까지 모두 선물로 받아들여야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재앙(우연)을 회피한 채 바라는 희망은 '거짓된 희망'과 '기대'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지금 전환이 필요하다면, 전환을 위한 우리의 입장은 재앙을 재앙으로 바로보고, 비극을 비극으로 직시하고 맞이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전환을 위한 철학'이라는 주제로 진행한 2020년 혜화동 저녁모임의 강의에서 이반 일리치를 만나는 일은 필연이 예비한 우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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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는 1970년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기작가이자 사상가였습니다. 그의 저서 『학교 없는 사회』 『병원이 병을 만든다』 『공생공락을 위한 도구』 등은 논증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겨왔던 근대의 확실성(certainties)에 의문을 제기한 획기적인 저서였습니다. 1982년 출간한 『젠더』는 일리치를 본격적인 근대사상의 저격수로 등장시킵니다. 이때부터 그는 '비근대'를 주장하는 사상가의 길로 나아갑니다. 오늘날 개발주의와 물질문명이 이룩한 근대세계를, 모두가 찬양하던 그 세계를 부정했던 것입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일리치에 열광했던 세계는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반 일리치를 '인간적 래디컬리스트'라고 부릅니다. 그는 세상에 대해 말하기보다 인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리치의 모든 표적은 인간의 자율성을 파괴하고, 근원적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학교라는 제도, 내 몸의 주인되기를 앗아가는 시스템화된 의료서비스, 우연으로 인한 삶의 축복을 박멸하는 근대성, 자기수련으로서의 읽기가 사라진 독서 등 12세기로 거슬러 오르며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현재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이 모든 지적 여정을 통해 그가 밝히고 싶었던 것은 '인간'이지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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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는 1966년 멕시코에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를 설립했습니다. 당시 세계적인 구호개발 붐에 구호활동에 참가하기 위한 청년들이 CIDOC에 와서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CIDOC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청년들은 구호활동을 포기했습니다. 일리치와 CIDOC은 전 세계가 숭배하던 개발 이념에 도전하며, 개발은 서구가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고 오히려 '근대화된 가난'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IDOC이 유명해지고 규모를 확장하고 제도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자 일리치는 전체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CIDOC의 폐쇄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폐쇄를 환영하며 축제를 열었습니다. 일리치는 도구가 적정수준을 넘어서면 시스템으로 변질되고, 시스템이 되는 순간 거부하거나 선택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일리치의 결정을 함께 만장일치로 동의해 줄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일리치와 친구들은 '개발'을 '발전'이라 부르며 각 문화권의 토착적인 삶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획일화된 삶의 양식으로 전환하려는 세계적인 움직임에 반대했습니다. 그 우정의 산물이 바로 『Development Dictionary』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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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의 사람들은 인간 삶의 객관적 조건, 즉 '삶의 필연(necessity)-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한계,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자기한계와 연민이라는 인간적 감정을 습득하고 삶의 필연에 순응 내지는 저항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를 꽃피워냈습니다. 이런 전통 사회의 일반적인 삶의 양식은 '가난'이었습니다. '가난'은 오늘날처럼 부나 지위, 명성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진 '삶의 필연'에 생태적이고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대처해나갈 때 당연하게 따라나오는 삶의 스타일이었습니다."

- 박경미

 

 

이반 일리치에 따르면 토착화된 가난을 통해 우정어린 삶이 가능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과거 전통사회가 발전된 현대사회보다 더 낫다는 획일적인 결론이 아닙니다. 일리치의 관심은 인간을 결핍된 존재로 보고 기본적인 욕구를 서비스와 상품으로 채워야 하는 '경제적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일리치와 그의 친구들은 다층적이고 다원적이던 풍요로운 인간 삶이 '경제', '성장', '개발'로 획일화되면서 근대화된 가난이 탄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부터 가난은 필연적 조건이 아니라 보편적 성격을 가진 병리현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 박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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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극복해야 한다는 것, 삶의 우연을 박멸하고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선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 인간은 욕구를 지닌 존재라는 것. 이반 일리치는 우리가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에 의문을 던지며 당연한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근대적 공리들의 분명한 시작점을 밝혀냈습니다. 코로나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 경제는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것, 과학기술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것, 이반 일리치가 정면으로 도전했던 근대적 공리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도전해야 하는 것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반 일리치를 만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것들에 정면으로 맞서며, 세계가 그를 향해 등을 돌리는 비운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반 일리치는 그것마저 선물로,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평생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있었고, 모든 불행이 빠져 나간 뒤에 희망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우리의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에게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믿음이 과연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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